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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농부 7084명 201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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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운림산방1
진도 운림산방3
소치 영정실......... 운림산방 뒷편에 있는 건물
소치기념관 전경
일하시는 분도 예술가이신 듯 ㅎㅎ
매주 토요일은 미술품 토요경매가 열리는 날.. 참관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 다음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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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운림산방2
운림산방 앞 연못
운림산방
운림산방
운림산방
운림산방
운림산방
운림산방 내부
운림산방 내부
운림산방에서 본 소치기념관
운림산방 부엌
운림산방 내부
운림산방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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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운림산방1
진도읍에서 2Km 떨어진 왕무덤재를 지나 5km 지점에 운림산방이 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운림산방은 크게 3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진도 역사관
둘째는 소치기념관
셋째는 운림산방이다. 소치기념관에서 본 운림산방
운림산방 앞 임시주차장 정자
목침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ㅎㅎ 낮잠이나 자면 좋겠네
소치기념관의 기단
운림산방
운림산방의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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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용장산성2(삼별초의 근거지)
용장산성 행궁터 옆에 있는 용장사... 올라가는 길
용장사 대웅전
금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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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용장산성1(삼별초의 근거지)
용장산성은 진도읍에서 10 Km정도 떨어져 있다
진도읍 풍경.. 진도읍에 가면 유난히 상점 이름에 '옥주'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있다. 옥주미용실 등..,알고보니 이곳의 옛 지명이 '옥주'
였다나. 여하튼 진도읍의 외형은 인근 해남읍의 4분지 1도 안되는 것 같다.
용장산성은 좁은 마을 길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 길에는 주민들이 농자재를 쌓아 놓아 비좁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안전운전하시길...
용장산성에 도착...토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입장료 받는 곳도 없다..
용장산성 안내문
용장산성 안내문...용장산성은 둘레가 13 Km나 되는 큰 성이라고 한다. 진도의 약 5분의 1을 차지한 셈이다. 강화도에서 패해 이곳가지 쫒겨온 군사가 많지 않았을텐데 13Km의 성을 방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안내도에는 '행궁터'라고 되어 있으니 이곳의 정식 명칭은 '용장산성 행궁터'라고 해야하고 용장산성은 이 행궁터를 둘러싼 산위에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산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남한산성을 생각해 보면 될 듯...행궁이란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며 정사를 보던 곳이니 이곳은 행궁터가 아니라 왕궁터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여몽연합군을 물리치고 언젠가는 개경으로 돌아가리라는 원대한 꿈을 삼별초가 가졌다면 왕궁이 아니라 행궁으로 불러야 할 것이고..
'웅장한 계단 형상의'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실제 본느낌은 웅장하지는 않다, 석축의 높이가 1M 정도이고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터도
몇백평정도이니 웅장하게 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용장산성 홍보관....너무 일찍와서 그런지 아직문을 열지 않았다.
행궁터 아랫부분에 있는 우물.. 웅장한(?) 행궁터의 우물치고는 초라하다.
사적임을 알리는 '작은 비석'
잡초사이로 머위가 곳곳에 무리지어 크고있다.... 삼별초군도 이 머위를 뜯어 반찬을 했을까?
아마도 저 산 위에 산성이 있었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용장사'라는 절이다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는 '작은 비석' 나하고 나이가 같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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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왕무덤재(삼별초의 근거지)
아침 일찍 서둘러 진도 운림산방으로 향했다. 진도읍에서 운림산방(5km)을 가는 도중에(2Km 지점) 왕무덤재가 있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려몽연합군에게 쫒겨 이곳 진도 용장산성에 궁을 짓고 항거했을 때 왕으로 옹립했다는 승화후 온(왕온)의 묘가 있다는 곳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왕무덤재를 넘자마자 왼쪽으로 '왕온의 묘' 주차장이 보인다. 한글로는 왕온의 묘 이지만 한자로는 '傳 王溫之 墓'라고 씌여있다. 즉, 왕온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왕온의 묘로 올가가는 계단. 약, 50 M를 올라가면 왕온의 묘가 있다. 나뭇잎이 무성하지 않으면 도로에서도 묘가 보이는데.... 길가에는 동백나무가 심겨져 있다.
'왕온의 묘' 일반인의 묘보다 약간 큰 무덤이다. 이 무덤이 왕온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다만 예로부터 이 고갯길이 '왕무덤재'라고 불려왔고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묘라서 왕온의 무덤이라고 추측할 뿐이라고. 그래서 한자에는 '傳'자를 넣은 듯.
묘 옆에 서있는 안내펀. 그리고 묘 뒷편에 게시된 온왕제를 알리는 현수막
'온왕의 묘' 안내판.. '몽고의 명장 홍다구'.... 명장이라는 글귀가 거슬린다... 명장? 꼭 이 안내판에 들어가야만 하는 수식어인가???
맨 뒤의묘가 왕온묘. 주위에는 주인 모를 묘가 듬성듬성 있다.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거의 마지막 동백꽃.. 한 때는 저 꽃들도 무성하게 아름다웠으리라.
이곳에서 왕온을 잃은 삼별초는 후퇴하여 남도석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지난번에는 이 길을 가다 궁녀들이 빠져 죽었다는 연못이 있는 걸 봤는데 이번 길에서는 찾지 못하여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마 왕무덤재 쉼터에 있는 정자 뒷편의 연못이었던 듯.. 지금은 메워져 조그만 연못이 되었지만 예전엔 상당히 크고 깊었다고 한다.
진도 왕온의 묘 삼별초 진도 남도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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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ㆍ퇴근 농민도 급증..농가 42%가 겸업
출ㆍ퇴근 농민도 급증..농가 42%가 겸업
자녀교육.경제문제.."교육지원, 일자리 늘려야"
(의정부=연합뉴스) 이유미 기자 = 경기도 연천 백학면 노곡1리에서 농사를 짓는 유인월(42)씨는 아침이면 출근 준비에 바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03년부터 연천에서 차로 1시간15분 정도 떨어진 고양시 일산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씨는 오전 8시면 연천으로 출발해 오후 6시까지 농사일을 한다. 왔다갔다하느라 한달에 들어가는 기름값만 20만원이 넘는다.
유씨가 이사를 결심한 이유는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이었다.
유씨는 "연천에는 변변한 학원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강사진 실력이 떨어진다."라며 "농촌에서 자녀교육을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육 때문에 이사한데 대해 가족 모두 만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업이 농사인 유씨로선 이만저만 고달픈게 아니다.
하루 세시간 가까운 출퇴근만이 아니다. 유씨가 농사를 짓는 밭과 논은 8천200㎡로 이것저것 빼고 나면 연간 순수입은 1천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씨가 선택한 게 '투잡'이다. 11년 전부터 서울 은평구에 정육점을 내 농사일과 병행하고 있다. 낮에는 부인과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하고 저녁에는 유씨가 들러 봐준다.
유씨는 "농사로만 생활비나 교육비를 충당할 수 없다. 농사야 365일 매달려야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유씨처럼 자식 교육을 위해 장거리 출ㆍ퇴근을 하거나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주말 가족', '기러기 농민'들이 늘고 있다.
또 농사일만으로는 사교육비 등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일을 같이하는 '투잡' 농민도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식 농사 위해 '기러기' 감수
경기도 포천 영북면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박동희(49)씨는 주말마다 가족들을 만나러 파주 문산에 간다.
박씨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 아내의 직장이 문산에 있는 데다 지금은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딸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10년전 이런 결정을 내렸다.
포천 사과영농조합 건물에 방 하나를 얻어 사는 박씨는 그동안의 자취 경력으로 청소나 빨래, 간단한 요리 등 집안일을 능숙하게 해낸다.
1996년 처음 포천에 와서 남의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짓던 그는 이제 사과밭 4만㎡를 가진 어엿한 농장주가 됐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빈집에 혼자 들어갔을 때의 외로움은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박씨는 "이제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가장 필요한 시기인데, 엄마 혼자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해 너무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충북 제천 한수면에서 22년째 사과 농사를 짓는 김운봉(45)씨도 '기러기 아빠'다.
그는 4년전부터 아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김씨는 주말이나 비가 와서 농사일을 못할 때면 경기도 이천에 집을 얻어 사는 부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차로 1시간20분을 달려간다.
김씨는 "한수면에는 중학교가 없어 아이가 학교를 가려면 버스를 타고 30~40분 떨어진 충주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투잡' 농민도 급증..전체농가 41% 겸업
경북 안동시 와룡면에 사는 김모(38)씨는 낮에는 과수원과 양봉 일을 하고 밤에는 운동화 세탁일을 한다.
농사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면서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 남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최근에 운동화 세탁업에 뛰어든 것이다.
물론 혼자서 가게를 꾸리기는 쉽지 않아 아내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농사일 틈틈이 시간을 내 가게에 들른다.
김씨는 "이제 농민들도 투잡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라며 "갈수록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투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국 농가 가운데 겸업농가 비율은 2003년 35.7%, 2005년 37.5%, 2008년 41.7%로 해마다 큰 폭으로 늘고 있다.
겸업농가 중에서도 농업 수입이 전체 수입의 50% 이상인 농가가 31.3%(2008년 기준)나 되는 등 겸업농가나 농업외 소득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마상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민들의 소득 구조에서 평균적으로 농업 소득이 3분의 1, 농외 소득이 3분의 2를 차지한다."라며 "농업으로만 생활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농지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에 전업농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도시 근로자 가구의 평균 연봉(4천만원)을 얻으려면 논농사는 6㏊, 과수원은 1.5㏊ 이상 경작해야한다. 이 규모 이하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다른 수입원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장사를 하는 등 자기 사업을 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겸업농가들은 인근의 농산물 가공단지나 사업장에서 일을 해주며 노임 소득을 얻는다.
김정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영농 규모를 확대해 소득을 늘리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농촌 지역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농외 소득을 늘려주자는 게 요즘 농업 정책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농사 지으며 몸만 '脫 농촌'..교육 지원 절실 = 농촌과 농업 전문가들은 농가 소득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촌의 사회.문화적 기반이 튼튼하게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교육문제다. 농촌 초등학교들이 학생 수 부족으로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서 농민 학부모들은 안심하고 자녀들을 맡길 곳이 없다.
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면서도 몸은 계속 도시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이런 교육 여건은 결국 인력과 자본을 도시로 집중시키게 돼 되레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촌 인구 통계를 보면 전체 농가의 14세 이하 인구는 2003년 37만7천여명에서 2008년 28만7천여명으로, 15~19세 인구는 17만6천여명에서 13만3천여명으로, 20~49세 인구는 101만9천여명에서 79만6천여명으로 줄었다.
소순열 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농민들이 도시에서 출ㆍ퇴근하거나 가족이 도시에 따로 살림을 꾸리면 생활비가 그만큼 추가되고, 농촌에서 순환할 돈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 교수는 "젊은 세대가 자꾸 빠져나가면 농촌은 활력을 잃은 노령화 사회가 된다."라고 말했다.
농촌 공교육을 활성화하려면 농어촌 특별전형이나 지역 균형 선발제 등 보다 적극적인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민선 농협대 교수는 "농촌 지역의 학교를 살리려면 도시보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불리한 농촌 지역 학생들에게 우대 정책을 펴야한다."라며 "서울대가 하고 있는 지역균형 선발제 같은 지원 정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농업은 부부가 같이 종사해야 시너지 효과가 난다."라며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서 자녀는 지역내 중ㆍ고교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gatsby@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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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농업에 종사하는 2130가구 중 벼농사를 짓는 농가는 860가구로 가장 많았고 이어 채소를 재배하는 농가가 594가구로 뒤를 이었다.
지역별로는 강동·강남·송파구 등 동부지역은 대부분 시설채소를 재배하고 있으며, 강서·양천·구로구 등 서부지역은 벼농사, 강남·관악구 등 남부지역은 시설화훼가 발달돼 있다.
주요재배작물로는 벼가 강서구에서 266ha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는 서울 전체 벼농사 면적의 93%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채소재배경지는 강남구가 137ha로 가장 많았고, 화훼는 서초구에서 98.1ha, 과수는 중랑구에 29.4ha로 가장 넓은 면적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시 김동익 농업기술센터소장은 "대도시 서울에서도 농업지역과 농업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이 많지 않지만 서울에도 농부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해 공급하고 있다"며 "농업기술센터는 이런 서울농부를 위해 농업기술지도를 하며 더 나아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텃밭농원, 어린이 자연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dios102@newsis.com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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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가장 속병이 든 이들이 있다. 자연이 준 냉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농민이다. 한 해 농사에 소득 대부분을 의지하는 상황에서 쌀값 파동과 구제역 등의 악재가 연이어 겹치면서 '잊혀진 직업'이 되어가는 농민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이와는 다르게 언론지상에는 성공한 귀농인의 사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통적인 벼농사가 아닌 부가가치가 큰 작물을 재배하는 이들에게서 농업의 나아갈 방향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부농의 뒤편에서 불확실한 소득과 만성 부채를 안고 허덕이는 평범한 귀농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편집자
주경호(가명, 37) 씨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원예를 전공하며 일찌감치 귀농에 뜻을 뒀다. 대학을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지난 2000년 가을 27세의 젊은 나이에 충남 부여의 한 농촌에 자리를 잡았다.
올해로 만 37세가 된 주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을의 최연소자다.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혼자서 땅을 일구는 일도, 농촌사회에 녹아들어 가는 일도 녹녹한 과정이 아니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농사일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성과도 나오고 있지만, 두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경영학과 나온 아내가 '가계부 못 쓰겠다'고 푸념하더라"
도시 출신인 주 씨가 농촌 마을에 적응하는 과정에는 이중의 역경이 있었다. 농업대학을 나온 데다 귀농 전 서울 가락시장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농업경제가 돌아가는 모습도 지켜봤지만 막상 농사일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첫 번째다.
"처음 내려왔을 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땅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간단한 농기계를 다루는 일까지 스스로 알고 깨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근처 마을에 예전에 알고 지내던 형님이 있어 조금씩 해결해가진 했지만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도 상당했죠."
주 씨가 마주친 또 하나의 장벽은 애초에 기대했던 농촌 문화의 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농사일에 대한 희망도 비전도 없이 버티면서 살아온 이들은 주 씨를 '얼마나 버티나 보자'라며 지켜보았다. 훈훈한 인심으로 공동체가 유지되는 농촌 마을의 풍경 역시 십 수년간 붕괴해온 농촌경제 속에서 조금씩 변질했다. 주 씨 역시 이 과정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소득이 얼마냐"는 말에 계면쩍게 웃었다.
"농민들은 숫자에 약해요. 이유가 있죠. 소득이란 게 농작물을 출하해서 들어온 돈인데 그때까지 짧게는 2~3개월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면서 비용을 계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농사일 자체가 너무 바빠서 관리가 안 되는 부분도 있죠. 딸기 출하 철에는 몇 달에 걸쳐 내다 팔지만 끝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주 씨도 처음엔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수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무작정 많이 짓고 보자는 식이었다. 첫해부터 논 1000평·밭 500평에 닥치는 대로 심었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소소한 빚이 늘어가는 과정이 4~5년 차까지 이어졌다.
2005년 결혼을 앞두고 주 씨는 비닐하우스 재배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지금까지 6600㎡(2000평) 면적의 밭에 비닐하우스 7동을 짓고 5동엔 유기농 딸기를, 2동엔 감자를 재배하고 있다. 딸기농사가 잘될 때는 1동에서 700~1000만 원까지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딸기는 작물 중에서도 '고급'에 속한다. 농촌 비닐하우스의 20~30%를 차지하는 수박농사의 1동당 소득은 200만 원 정도다. 작물별로 사육기간과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가격이 갈린다. 딸기는 비닐하우스로 이양하기 전 모종을 키우는 육묘기간까지 포함해 15개월이 소요된다. 무나 배추처럼 철 따라 가격이 널뛰기를 덜 하는 것도 장점이다.
문제는 안정성이다. 지난해 그는 딸기농사로 3000만 원을 벌었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 볕이 잘 들지 않았던 3월을 거치면서 최대 2톤까지 기대했던 생산량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생산량이 줄었다고 비용이 줄어드는 일은 없으니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고랑에 비닐을 깔거나 비닐하우스를 칠 때 들 때만 사람이 5~10명은 필요해요. 게다가 유기농 딸기라 흰가루병이라도 생기면 농약을 쓰지 못해 유황을 태워 없애야 해요. 농약보다 배는 비싸지만 효과는 절반이에요. 그런데 유황을 태우면 비닐이 빨리 삭아서 1년에 한 번꼴로 갈아야 해요. 1동에 비닐 값만 100만 원이 들고, 인건비까지 합치니 350~400만 원이 들어가더라고요."
병충해 등이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비용 계산이 더 힘들다. 그때그때 통장에 남아있던 돈이 빠져나가고 잔액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야 한다. 비닐하우스를 시작한 지 5년이 갓 넘은 주 씨로선 경험 부족 역시 예측을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다. 주 씨는 "아내가 경영학과를 나왔는데 '가계부를 못 쓰겠다'고 푸념해요. 돈 들어올 데는 없는데 나가기만 하니까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농촌의 문제는 문화생활 등이 힘들거나 하는 데 있지 않아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몸이 힘들고 생활이 부대껴도 일정한 소득만 보장되면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진 않았을 거예요. 어느 정도 가계를 꾸릴 수만 있어도 자식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못 얻어 창피해 고향에 내려오지 못하는 일도, 조그마한 직장만 구해도 어른들이 으쓱거리며 자랑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연 매출 2억 농민 "나 빚이 3억이란 말은 왜 안 할까?"
주 씨의 사정은 나은 편에 속한다. 유기농이라 일반 딸기보다 단가가 1.5배 정도 높게 형성되고 생활협동조합에 일괄 납품해서 판로도 안정된 편에 속한다. 생협 측과는 출하 이전에 가격을 책정하고 계약을 맺기 때문에 가격이 춤출 이유도 상대적으로 적다.
"고추 농사 같은 경우 작년보다 생산량이 10~20%만 올라가도 가격은 30~50%씩 곤두박질 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 처진 나은 편이지만 올해처럼 작물의 1년 뒤 상황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게 변하진 않아요. 작목을 쉽게 바꿀 수도 없어요. 그건 직장인이 직업을 바꾸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고민도 많이 해야 하고 투자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예측이 어려우니 작목 전환도 마치 로또 번호 찍듯이 해야 하는 거죠"
딸기 농사를 시작하면서 주 씨는 이미 많은 빚을 졌다. 2005년 결혼을 앞두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후계농업자금을 신청했다. 5년 거치에 10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8000만 원을 받아 땅을 매입했다. 이자율은 3%로 월 20만 원 수준이라 처음엔 부담이 없었지만 원금 상환 시기가 멀지 않았다. 여기에 생활비와 집안 사정이 겹치면서 생활비 명목으로 농협에서 3000만 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이자율은 8%로 한 달 이자가 정책자금과 비슷하다.
"정책자금 상환이야 정 어려우면 땅을 되팔아서 갚으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다른 대출은 고스란히 떠 앉아야죠. 처음엔 큰 빚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난이 아닌 거예요. 다들 사정이 비슷해요. 양송이버섯을 재배하는 형님 한 분은 연 매출 2억 원을 올려서 '6시 내고향' 같은 방송 프로그램도 출현했는데 나중에 저한테 그러더군요. '나 빚이 3억이라는 말은 왜 안 할까?'"
고민하던 주 씨는 지난해부터 딸기잼 판매를 시작했다. 마당에서 솥에 불을 지키고 바닥에 잼이 눌어붙지 않도록 한 번에 3시간씩 주걱으로 저어야 했다. 아이를 업은 아내까지 가세해 만든 잼을 개인 인맥으로 알음알음 팔아 1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상당한 소득이지만 한창 바쁠 땐 새벽 3~4시부터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야 하는 주 씨로서는 이를 병행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올해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냉해를 입으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했다.
"요새 여름에 유행하는 아이스 딸기를 만들어 팔아볼 생각도 했어요. 딸기를 급속 냉각해서 보관했다가 여름에 파는 건데 이걸 하려면 냉동고가 필요하거든요. 사려면 또 빚을 져야죠. 끝이 없어요."
"학원? 교육보다는 애 볼 시간이 없어서…"
불안정한 수익과 늘어나는 빚은 주 씨의 생활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루에 버스가 5번 오는 곳에서 아이를 이웃 면 소재 어린이집에 맡기려면 차량은 필수다. 여기에 농작물을 운반하는 트럭도 필요해 차만 2대를 굴려야 한다. 한 달에 50~60만 원이 드는 기름값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주 씨는 지난달 무쏘를 마티즈로 바꿨다.
이제 막 4살이 된 첫째 딸과 돌을 앞둔 둘째에 들어가는 비용은 부모의 도움 등이 있어서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땐 빨아 쓰는 면 기저귀를 샀을 정도다. 젊은 나이에 귀농을 결심한 만큼 아이들 건강 문제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를 낳은 후에는 이마저도 감당이 안 돼 일반 기저귀로 바꿨다.
큰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농어촌 자녀에게 지급되는 육아 보조금 덕에 7~8만 원의 비용만 든다. 아이들 장난감도 주위에서 얻거나 인터넷 장터에서 중고로 매입했다. 하지만 주 씨는 셋째를 낳으려던 계획을 접었다.
"마을에 아이가 없으니 적어도 3명은 낳아서 서로 어울리면서 컸으면 했어요. 주위에서도 '아들 하나 낳아야지'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하지만 형편상 한 명을 더 낳긴 무리더군요. 학원이요? 제가 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런 고민 해본 적 없어요. 저희보다 큰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 학원에 보내긴 하지만 교육보다는 농사일 때문에 애를 못 보니 맡기는 경우가 많아요."
'재테크'란 말을 꺼내자 주 씨는 "아내 생명보험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해지한 상태"라고 답했다.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이들 이름으로 든 3만 원짜리 보험과 자동차 보험, 국민건강보험이 '미래를 위한 대비'의 전부다. 심지어 국민연금도 내지 못한다. 귀농 초기에는 소득과 자산이 거의 없어 대상자가 아니었고, 몇 년 뒤부터 고지서가 날아왔지만 도저히 여유가 되지 않아 뜯지 않은지 꽤 되었다고 한다.
"저뿐만 아니다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빚을 가지고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농기계와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이죠. 저만 해도 좀 더 입지가 좋은 곳으로 비닐하우스를 옮기고 싶은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만 5000만 원이 넘어가요. 중고품을 산다고 해도 정책자금이나 농협 대출이 필수죠. 여기에 농사를 한두 번이라도 망치면 상환이 힘들어지는 거죠. 젊은 사람들일수록 의욕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요."
주 씨의 살림에 그나마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거주 문제다. 농사를 망치고 마을을 떠난 이가 내놓은 집을 마을 문중이 경매로 구입해 그에게 내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3년이면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 문중의 산소 몇 장 깎아주는 대가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줘서 고맙다고 돈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고 주 씨가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한 농사'는 권하고 싶지 않아"
귀농을 후회하느냐고 묻자 그는 "2~3번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있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답했다. 처음부터 돈 욕심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무리해서 일을 더 벌일 생각도 없다. 비닐하우스를 2배로 늘린다고 수익이 두 배로 느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년간의 귀농생활에서 얻은 경험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농사"를 권하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고향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연고도 없는 곳에서 농촌 문화에 스며드는 일지 쉽지 않을뿐더러, 가진 것 없이 땅만 일궈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귀농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어요. 자기의 노력과 실력에 따라 작물을 잘 선택해 '대박'을 맞는 일도 있지만, 단언컨대 성공한 사람들의 열에 아홉은 정부 보조금을 잘 지원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정부의 농업정책에 걸맞은 사업을 신청하면 잘 밀어주는 편이라 비용의 절반은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융자와 자부담으로 해결하는 식이죠. 성공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많아요."
농업정책, '규모화'의 허상 걷어내야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로 농업 개방이 이루어진 후 정부의 농업정책은 한결같이 '규모화'에 맞춰져 있었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과 경쟁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도입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농산물을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방향은 무리하게 경작지만 늘리다가 부채가 장기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또한 불안정한 수급 구조는 물가 파동이 덮칠 때마다 농민이 논밭을 갈아엎고 서울로 상경투쟁을 떠나는 풍경을 낳았다. 통계청의 농가경제조사결과에 따르면 2006년 가구당 평균 1209만2000원을 기록했던 농업소득은 2009년 969만8000원으로 줄어들었다. 농가의 총수입에서 농업소득 비율을 나타나는 수치는 2005년 44.6%에서 2009년 36.4%까지 떨어졌다. 최근에는 냉해와 구제역, 쌀값 파동 등을 거치면서 농민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지원을 중단하면서 쌀 재고량이 늘어나 쌀값은 20년 전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순수 농업으로 소득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고 이는 농촌의 붕괴현상을 낳았다. 남아 있는 이들도 희망과 목표를 상실하고 부채를 감당해가며 기약 없는 씨를 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가 농업을 산업 관점에서만 바라보면서 '규모화'에 중점을 둔 지원정책을 유지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식량안보의 관점에서 다양한 작물의 자급률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보조금 정책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에 이은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농업 선진국들이 자국 농민들에게 지출하는 막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는데 강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농업생산액 대비 농업보조금 비율은 40%가 넘어가며 유럽연합 전체로 봐도 22%에 이른다. 자유무역협정을 주도하는 미국 역시 보조금 비율은 10%를 넘어서지만 한국은 6.4%에 머문다. 또한 보조금 지급 형태 역시 다르다. 다른 나라들은 농민들의 소득을 직접적으로 보전해주는 정책을 취해 EU의 경우 농가소득의 70% 이상이 지원금이라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WTO 협정 위반을 이유로 대부분이 간접 지원 방식으로 이뤄진다. 혹자는 2004년 한·칠레 FTA 이후 농업에 들어간 지원금만 106조 원에 이른다는 점을 들며 농민들의 '보조금 따먹기' 경쟁이 도덕적 해이를 나았다고 비판하지만 예산 대부분이 기반설비나 농지정비, 유통 인프라 지원에 소요됐을 뿐 농민들 호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16% 수준에 불과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곽길자 정책국장은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도 농업법을 개정하면서 대규모 영농보다는 가족농 중심의 자급구조를 강화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며 "하지만 한국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조하면서도 추세와 맞지 않는 규모화와 친환경 농업론 등을 추진하는 모순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곽 국장은 "농업경제의 해법은 결국 정부가 농업정책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의지를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기금 등을 조성해 농산물 가격 파동의 폭을 조절하고 감산정책보다는 쌀 이외에는 5%로 미치지 못하는 농산물 자급률을 올리기 위해 작물을 전환하는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김봉규 기자(=부여) ( srv@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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