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반,,,이렇게 일찍 농장에 온 것은 처음같아요.

 열심히 준비물을 챙깁니다. 풀 깍을 것,

 달개비 꽃

 나팔꽃

 달맞이꽃

 아침햇살을 맞아 눈부신 고구마 밭

 녹용 보약(?)을 먹고 밤사이 더 파릇파릇해진 고구마잎....

 내려가는 길은 천안 인근에서 잠시 밀려서 2시간 40분만에 도착했네요. 작은마버지, 작은어머니, 사촌동생이 먼저 도착해서 벌초를 하고 있어요.

 동생이 먼저 예초기로 풀을 깍고 있어요.

 멀리 보이는 마이산.  뚱뚱한게 암마이산, 뾰족한게 숫마이산..암수 한쌍입니다. 부부산이죠.

 멀리 왼쪽에 보이는 산이 백운산...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이 있는 산이죠. 오른쪽은 우리 고향집 뒷산..내동산 이라는데 어릴적에는 이름이 있는지도 몰랐답니다 ㅎㅎ

 내동산 전경.. 왼쪽 봉우리 위에 큰 참(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와 마을 뒤에 있는 나무를 쇠줄로 연결해서 산 위에서 땔감을 한 후 꽁꽁 묶어서

철사고리에 매달아  쇠줄에 내려 보내면 쇠와 쇠가 부딪히느라 파-파-팍 불꽃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산꼭대기에서 마을까지 내려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아이디어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험한 저 산을 어떻게 땔감을 지고 내려왔을까요.

 

멀리 가운데 뾰족하게 보이는 부분이 '사람 얼굴 닮은 바위' 입니다. 작아서 잘 안보이지만 우리 고향집에서 보면 사람 얼굴같이 눈,코,입 다 있답니다.

국민학교때 교과서에 나온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그 글을 읽으며 그 바위와 소년이 저 바위와 저 처럼 느껴졌었답니다.

세월이 지나보니 그건 아니네요 ㅎㅎ

그 소설에서는 후에  저 바위를 닮은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란 소년이 나중에 커서 보니 자기가 바로 그 바위를 닮은 훌륭한 소년이 됐다는

그런 얘기 였던 것 같은데...쩝

 

 

인삼밭...살짝 엿봅니다.

 이 윗길로 올라가면 내동산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가 있네요. 표지판까지 만들어 놨습니다.

 계속되는 비로 고추들이 명들고 말라죽어 고추값이 작년의 3배라는데..여기는 고추농사가 잘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병도 많이 들었고 줄기도 말라 죽어가는게 많아요. 올해는 국산 고추 구하기가 힘들 모양입니다.

예초기를 열심히 돌렸더니 3시간 만에 말끔히 벌초를 했습니다. 작년엔 서툴었는데 한해 해보니 경험이 쌓여 훨씬 수월하네요.

 

 조상님들의 놀이터였던 만취정(晩趣亭) 청소하러 갑니다. 만취정.....느림을 즐기는 정자..이런 뜻인가 봅니다. 느림의 미학, Slow Food 등 느림이 유행할 줄

몇백년전에 예상을 하셨나 봅니다. 가운데 바위틈 사이에 숨여 있어 잘 안보이실 것 같아요.

 여기가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 상류지역입니다. 

 정자 바로 아래 바위에 쓰여있는 송객정(送客亭) 손님을 떠나 보내는 정자...우리 어릴때는 이 근처를 송가쟁이 송가쟁이라고 해서 솔가지를 말하는 건가?

뭔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 보니 송가정을 송가쟁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네요.  제 어릴적에도 우리집엔 할아버지 전국 각지에서 친구들이 찾아 오셔서 며칠씩

묵어가셨는데... 얼마나 보내기 싫었으면 여기까지 배웅을 했을까요. 

 정자에서 바라본 우리 고향마을..한눈에 보이네요.

 섬진강 상류쪽. 이 물어세 어릴적에는 나체로 친구들과 비료푸대 뒤집어 바람넣어 튜브처럼 해가지고  개헤엄치고, 좀 더 커서는 물고기 잡아 어죽도 끓여 먹고

해야 했는데 그런 것 할 만한 나이에 고향을 떠나서 아쉽게도 추억이 멈춰버렸습니다.

 하류쪽... 해가 어스름한 저녁나절에 삼촌이 저 물에 들어가서 그물을 쳐 놨다가 새벽에 가서 걷어 오면 붕어 피리 빠가사리 메기..이름도 기억 안나는 물고기들이

제법 잡혔었죠.

 정자 청소는 우리 가족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중 어른들과 같이 합니다. 사십여년만에 뵙는 얼굴이라 성함은 긴가민가 하지만 얼굴 모습은 알아보겠네요.

 

 

 

 현판을 보니 숭정무진(崇禎 戊辰) 우짜고 저짜고 써있으니 이 정자를 만든 해를 추측할 수 있겠는데 제 실력으로는 어렵네요. ㅠㅠ

인터넷에 조회를 해보니 보물 839호 '숭정9년 명신법지평일구'라는 해시계가 인조 14년(1636년)에 만든 것이라니 이 정자도 대략 그 때쯤 지어진 건가요????

 그때 이 정자를 지으신 조상님들이 5형제이셨는데..바로 이 분들이셨답니다. 우리 집은 다섯째 아들(화락당 봉) 집안이네요. 원래는 남원에 사시다가 난을 피해

이 곳으로 오셨다는는군요

 400여년전(?)에 지은 원래 정자는 그 뒤 없어지고 단기 4302년(서기 1969년)에 다시 지었네요. 저도 어렸을적에 목수 아저씨가 우리집 마당에서 나무를 다듬던 생각이

납니다. 그 목수 아저씨가 제 친구 아버님이어서 더 기억이 나요. 먹줄로 줄 그어가며 대패질 하던 생각이죠.

 

 

 이 낭떠러지에 이만한 집을 세우려면 돈도 꽤 많이 필요했을 텐데... 그리고 내려가는 길이 낭떠러지라 위험해서 조상님들이 술은 많이 못드셨을 것 같아요.

만취정..느림을 즐기는 정자...이제는 세월이 흘러 많이 쇠락했지만 자연을 벗삼아 느리게 살고자 하셨던 조상님들의 정신은 남아있네요.

 추석을 앞두고 조상님 묘소 벌초하러 고향에 갑니다. 부모님 모시고 동생과 함께 오랫만에 가는 길입니다.

마이산휴게소 전망대에서 본 마이산의 모습.. 저 산넘어 반대편이 제 고향마을입니다.

 휴게소 위 정자

 한국의 명승 12호?? 저도 처음 알았네요. 저한테 보고도 안하고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요 ㅎㅎ

마이산은 용암이 분출되지 못하고 땅속에서 그대로 굳었다가 위를 덮었던 흙이 사라지자 나타난 산이라서

직접 보면 더 신기합니다. 꼭 콘크리트에 자갈 섞어놓은 것처럼 생겼죠.. 

한라산이나 백두산처럼 용암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만 봐왔기 때문에 더 신기하죠.

화가나면 밖으로 분출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속에 삭이고 참는 사람도 있듯이... 마이산은 참고참아

오늘처럼 유일무이(?)한 용암산이 되었습니다.

 마이산 조각과 마이산의 모습이 잘 어울립니다. 우리 집에도 이런 마이산 조각을 만들어 놓을 텐데 쩝...

입맛만 다십니다.

 저 길을 걸으면 하늘까지 갈 수 있을까요

 조상님 묘소가 있는 곳에서 본 마이산의 모습... 휴게소 정 반대편이죠

 예초기를 열심히 돌렸더니... 아직 실력이 좋지 않아 깔끔하게는 안되네요. 애지중지하던 장손자가 깍아드리니

마음은 흐믓하실 듯 합니다.

 동생이 교대로 예초기를 돌리고 어머니는 먹을 것을 준비하시고. 동생은 처음하는 일이지만 저보다 더 잘하네요.

예초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척척 고치기도 하고.. 그래도 공대출신이라고 좀 다르긴 한가 봅니다.

 작은 아버지는 풀 베시고

 사촌동생도 열심히 예초기를 돌리고 ...

 무지 산골 동네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이 우리 고향마을 뒷산입니다. 어릴 때는 저 산에가서 나무도 베어

오고.. 진달래도 따먹고..다래. 머루도 따먹고..토끼도 잡고... 해야 했는데..

무서움을 많이 타서 많이 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때 새소년인가 하는 어린이 잡지책엔 '4차원의 세계로 사라진 사람들'.. 뭐 이래서 친구들하고 놀던 아이가

바위뒤로 숨었는데 갑자기 사라지져.... 뭐 이런 믿거나 말거나 하는 글을 읽고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무서워서 ㅠㅠ  지금 생각해 보면  어설프게 아는 게 병입니다. ㅎㅎ

 

 전봇대 아래 조그만 밭이 얼마전 고인이 되신 백남봉 선생이 어릴적(약 60년전) 살던 초가집이 있었던 자리

랍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았죠. 무지 가난하게 살던 어린시절에도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던분인데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셔서 아쉽네요..

 

전봇대 뒤에 보이는 저 집은 어릴적에는 복숭아밭 가운데 있던 집이었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복숭아

서리해 먹으려다 들켜서 놀라 가방보따리도 던져버리고 도망갔다가  친구가 잡혀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자수

해서 손들고 서서 혼났습니다..지금은 빈집이 되고 복숭아 나무는 없고 참깨밭이 됐네요

 제가 살던 고향마을입니다. 방화(芳花)부락.. 꽃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바로 고향마을 뒷산이 내동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걸 어릴때는 몰랐습니다.

그냥 '시낭골'이라고 불렀는데 '信仰골'을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골짜기가 제법 깊고 그 안에는 무당들이 사는 조그만 집들이 있어서 그렇게 불른 것 같습니다.

마을 맨 왼쪽 끝에 350년된 느티나무가 서있고 우리집은 바로 그 옆집이랍니다. 잘 보이지는 않네요. 뒷편에 개간밭은 어릴적 어머니가

괭이로 나무뿌리를 하나씩 캐내서 만든 것이랍니다. 저도 물론 옆에서 나무뿌리를 날랐죠..   

그때는 진달래 뿌리가 그렇게 많아 귀찮아 다 버렸는데.. 지금은 목부작(나무뿌리에 난 올려 키우는 것)에 쓰려고 비싸게 사간답니다. ㅠㅠ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아 다시 산이 돼가고 있습니다.

겨울밤에는 저 느티나무 가지에 부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또 그 위에서 부엉이가 부엉부엉

울어대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

 

네시간 후..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조상님들 머리를 깍아 드리니 마음도 시원합니다.

 고향마을을 흘러가는 냇물... 섬진강 상류지역이라 깨끗합니다.

오른쪽 산 중턱에는 바위를 깍아내고 우리 조상님들이 만든 놀이터.. 만취정(晩趣停)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삶의 여유를 느끼시는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랑하려고 하시는지...가보자고 하시는데...

 

잘 모르는 분들은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정자지어 놓고 기생들 불러다 술타령이나 하던 졸부로 오해할 수 있겠네요.

(속마음은 "네 조부님들이 탐관오리로 이 앞 땅을 다 사놓았는데.. 이제 그게 다 네 것이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6대조 할아버지 5형제분들이 힘을 모아 만든 형제애의 상징이랍니다. ㅎㅎ

수해복구공사하느라 길이 끊겨서 오늘은 가보지는 못하고 시간도 늦어 다음을 기약합니다.

 어릴때는 그 정자아래 냇물에서 멱도 감고 고기도 잡고 즐겁게 놀았답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추억을 간직하고 잘 살겠죠

* 진안 마이산은 대전-통영고속도로 장수JC에서 완주/전주쪽 고속도로로 진입하면 쉽게 가실수 있어요. 서울에서도 3시간이면 충분하죠.

 예전엔 무주,진안,장수가 한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구 였는데 앞글자만 따서 "무진장"이라고 불렸습니다, 말 그대로 무진장 산골동네

 였는데 대전-통영고속도로 생기고 교통이 많이 좋아졌답니다. 인삼도 많이 재배해서 진안장에 가시면 싸게 살 수 있답니다.

 

* 마이산에 가시면 진안읍에서 바로 가시는 길과 금당사라는 곳으로 돌아가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금당사길로 가시면 좀 더 걸어도 구경할 곳이 많습니다. 금당사에서 마이산 중간에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옆에 부부시비가 있는 데.. 그 부부시비가 바로 저희 6대조 할아버지 부부랍니다.

 

=================================================================================

[사람과산] 92년 12월호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방화마을 (취재 / 92.10.24-25)

마령 가는 밤길엔 비와 진눈개비가 쏟아졌다. 송영호와 함께 하주용 노인댁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삼의당 부부시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비는 일요일 아침에도 여전히 부슬거렸다. 아침상을 물리고 만취정 따위 볼 것들 구경을 다녔다. 내친 김에 금당사 저수지 근처에 있는 부부시비(詩碑), 강정리의 오현사(五賢祠) 및 둥구나무 전설을 살폈다. 마이산 뒤켠의 이산묘( 山廟)가 이채로웠고, 구산서원은 그 자리잡음이 으뜸이었다. 서원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임실군 관촌면 신흥사 일대, 히여터 필봉산 베트라 따위 다음 산행 및 마을 구간들을 예비답사 했다.

 

+ Recent posts